4. 민족에 내놓은 몸 ②
나라의 명맥이 경각에 달렸으되 국민 중에는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많았다.
이에 일변 깨달은 지사들이 한데 뭉치고 또 일변 못 깨달은 동포를 계발하여서 다 기울어진 국운을 만회하려는 큰 비밀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신민회였다. 안창호는 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 교육을 표면의 사업으로 하면서 이면으로는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 등과 기타 몇 사람을 중심으로 하고 4백여명 정수분자로 신민회를 조직하여 훈련·지도하다가 안창호는 용산 헌병대에 잡혀 갇혔다. 합병이 된 뒤에는 소위 주의인물을 일망타진할 것을 미리 알았음인지, 안창호는 장연군 송천에서 비밀히 위해위로 가고, 이종호, 이갑, 유동열 등 동지는 뒤를 이어서 압록강을 건넜다.
서울에서 양기탁의 이름으로 비밀회의를 할 터이니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로 나도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로 나도 출석하였다. 그때 양기탁의 집에 모인 사람은 주인 양기탁과 이동녕,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도희와 그리고 나 김구였다. 이 회의의 결과는 이러하였다.
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 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 계획을 세우고 또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 전쟁에 쓸 장교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 도 대표를 선정하니 황해도에 김구,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이었다. 이 대표들은 급히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판비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경술년 11월 1일 아침, 서울을 떠났다. 양기탁의 친 아우 인탁이 재령 재판소 서기로 부임하는 길로 그 부인과 같이 동차하였으나 기탁은 내게 인탁에게도 통정은 말라고 일렀다. 부자와 형제간에도 필요 없이는 비밀을 누설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사리원에서 인탁과 작별하고 안악으로 돌아와 김홍량에게 이번 비밀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말하였더니 김홍량은 그대로 실행하기 위하여 자기의 가산을 팔기로 내놓았다.
그리고 신천 유문형 등 이웃 고을 동지들께도 비밀히 이 뜻을 통하였다. 장연 이명서는 우선 그 어머니와 아우 명선을 서간도로 보내어 추후하여 들어오는 동지들을 위하여 준비하기로 하고 일행이 안악에 도착하였기로 내가 인도하여 출발시켰다.
이렇게 우리 일은 착착 진행중에 있었다.
어느 날 밤중에 안명근이 양산학교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가 서울 가 있는 동안에도 누차 찾아왔었던 것이었다. 그가 나를 찾은 목적은,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돈을 내마 하고 자기에게 허락하고도 안 내는 부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우선 안악 부자들을 육혈포로 위협하여 본을 보일 터이니, 나에게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과는 상관이 없고 안명근이 독자로 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돈을 가지고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의 계획에 의하면 동지를 많이 모아서 황해도의 전신과 전화를 끊어 각지에 있는 왜적이 서로 연락하는 길을 막아 놓고 지방지방이 일어나서 제 지방에 있는 왜적을 죽이라는 영을 내리면 반드시 성사가 될 것이니 설사 타지방에서 왜병이 대부대로 온다 하더라도 닷새는 걸릴 것인즉 그동안은 우리의 자유로운 세상이고 실컷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명근의 손을 잡고 이 계획은 버리라고 만류하였다. 여순에서 그 종형 중근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달리 격분도 할 일이지마는, 국가의 독립은 그런 일시적 설원으로 되는 것이 아닌즉 널리 동지를 모으고 동포를 가르쳐서 실력을 기른 뒤에 크게 싸울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뜻을 말하고, 서간도에 이민을 할 것과 의기 있는 청년을 많이 그리로 인도하여 인재를 양성함이 급무라는 뜻을 설명하였다. 내 말을 듣고 그도 그렇다고 수긍은 하나 자기의 생각과 같지 아니한 것이 불만한 모양으로 서로 작별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아니하여서 안명근이 사리원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 신문으로 전하였다.
해가 바뀌어 신해년 정월 초닷샛날 새벽, 내가 아직 기침도 하기 전에 왜 헌병 하나가 내 숙소인 양산학교 사무실에 와서 헌병 소장이 잠깐 만나자 한다 하고 나를 헌병 분견소로 데리고 갔다. 가보니 벌써 김홍량, 도인권, 이상진, 양성진, 박도병, 한필호, 장명선 등 양산학교 직원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 모양으로 불려 왔다.
경무총감부의 명령이라 하고 곧 우리를 끌어내어 사리원으로 가더니 거기서 서울 가는 차를 태웠다. 같은 차로 잡혀가는 사람들 중에는 송화 반정 신석충 진사도 있었으나 그는 재령강 철교를 건널 적에 차창으로 몸을 던져서 자살하고 말았다.
신 진사는 해서에 유명한 학자요 또 자선가였고 그 아우 석제도 진사였다. 한 번 내가 석제 진사를 찾아갔을 때에 그 아들 낙영과 손자 상호가 동구까지 마중 나오기로 내가 모자를 벗어서 인사하였더니 그들은 황망히 갓을 벗어서 답례한 일이 있었다.
또 차중에서 이승훈을 만났다. 그는 잡혀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포박되어 가는 것을 보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차가 용산역에 닿았을 때에(그때에는 경의선도 용산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왔었다) 형사 하나가 뛰어올라 와서 이승훈을 보고, "당신 이승훈 씨 아니오?" 하고 물었다. 그렇다 한즉 그 형사놈이, "경무총감부에서 영감을 부르니 좀 가십시다."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와 같이 결박을 지어서 끌고 갔다. 후에 알고 보니 황해도를 중심으로 다수의 애국자가 잡힌 것이었다. 이것은 왜가 한국을 강제로 빼앗은 뒤에 그것을 아주 제 것을 만들어 볼 양으로 우리 나라의 애국자인 지식계급과 부호를 모조리 없애 버리려는 계획의 제일회였다. 그러기 위하여는 감옥과 이왕 있는 유치장만으로는 부족하여 창고 같은 건물을 벌의 집 모양으로 간을 막아서 임시 유치장을 많이 준비하여 놓고 우리들을 잡아 올린 것이었다.
이번 통에 잡혀 온 사람은 황해도에서 안명근을 비롯하여 신천에서 이원식, 박만준, 신백서, 이학구,유원봉, 유문형, 이승조, 박제윤, 민영룡, 신효범, 안악에서 김홍량, 김용제, 양성진, 김구, 박도병, 이상진, 장명선, 한필호, 박형병, 고봉수, 한정교, 최익형, 고정화, 도인권, 이태주, 장응선, 원행섭, 김용진등이요, 장연에서 장의택, 장원용, 최상륜, 은률에서 김용원, 송화에서 오덕겸, 장홍범, 권태선, 이종록, 김익룡, 장연에서 김재형, 해주에서 이승준, 이재림, 김영택, 봉산에서 이승길, 이효건 그리고 배천에서 김병옥, 연안에서 편강렬등이었고, 평안남도에서는 안태국, 옥관빈, 평안북도에서는 이승훈, 유동열, 김용규의 형제가 붙들리고, 경성에서는 양기탁, 김도희, 강원도에서 주진수, 함경도에서 이동휘가 잡혀와서 다들 유치되어 있었다. 나는 이동휘와는 전면이 없었으나 유치장에서 명패를 보고 그가 잡혀온 줄을 알았다.
나는 생각하였다. 평거에 나라를 위하여 십분 정성과 힘을 쓰지 못한 죄로 이 벌을 받는 것이라고, 이제 와서 내게 남은 일은 고후조 선생의 훈계대로 육신과 삼학사를 본받아 죽어도 굴치 않는 것뿐이라고 결심하였다.
심문실에 끌려나가는 날이 왔다. 심문하는 왜놈이 나의 주소. 성명 등을 묻고 나서,"네가 어찌하여 여기 왔는지 아느냐." 하기로 나는, "잡아오니 끌려 왔을 뿐이요, 이유는 모른다." 하였더니 다시는 묻지도 아니하고 내 수족을 결박하여 천정에 매달았다. 처음에는 고통을 깨달았으나 차차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이 들어보니 나는 고요한 겨울 달빛을 받고 심문실 한구석에 누워 있는데 얼굴과 몸에 냉수를 끼얹는 감각 뿐이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왜놈은 비로소 나와 안명근과의 관계를 묻기로 나는 안명근과는 서로 아는 사이나 같이 일한 것은 없다고 하였더니, 그놈은 와락 성을 내어서 다시 나를 묶어 천정에 달고 세 놈이 둘러서서 막대기와 단장으로 수없이 내 몸을 후려갈겨서 나는 또 정신을 잃었다. 세 놈이 나를 끌어다가 유치장에 누일 때에는 벌써 훤하게 밝은 때였다. 어제 해질 때에 시작한 내 심문이 오늘 해뜰 때까지 계속된 것이었다.
처음에 내 성명을 묻던 놈이 밤이 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놈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일에 충성된 것을 알았다. 저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이렇게 악형을 받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옆 방에 있는 김홍량, 한필호, 안태국, 안명근 등도 심문을 받으러 끌려나갈 때에는 기운 있게 제 발로 걸어나가나 왜놈의 혹독한 단련을 받고 유치장으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반죽음이 다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치미는 분함을 누를 길이 없었다.
한 번은 안명근이 소리소리 지르면서, "이놈들아, 죽일 때에 죽이더라도 애국 의사의 대접을 이렇게 한단 말이냐." 하고 호령하는 사이사이에 "나는 내 말만 하였고 김구, 김홍량들은 관계가 없다고 하였소." 하는 말을 끼어서 우리의 귀에 넣었다.
우리들은 감방에서 서로 통화하는 방법을 발명하여서 우리의 사건을 보안법 위반과 모살급 강도의 둘로 나누어서 아무쪼록 동지의 희생을 적게 하기로 의논하였다.
양기탁의 방에서 안태국의 방과 내가 있는 방으로, 내게서 이재림이 있는 방으로 이 모양으로 좌우 줄 20여 방, 40여 명이 비밀리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왜놈들은 우리의 심문이 진행됨을 따라 이것을 통방이라고 칭하였다. 사건의 범위가 점점 축소됨을 보고 의심이 났던 모양이어서 우리 중에서 한순직을 살살 꾀어 우리가 밀어하는 내용을 밀고하게 하였다. 어느 날 양기탁이 밥 받는 구멍에 손바닥을 대고, 우리의 비밀한 통화를 한순직이가 밀고 하니 금후로는 통방을 폐하자는 뜻을 손가락 필답으로 전하였다. 과연 센 바람을 겪고야 단단한 풀을 알 것이었다. 안명근이 한 순직을 내게 소개할 때에 그는 용감한 청년이라고 칭하더니 이 꼴이었다. 어찌 한 순직뿐이랴, 최명식도 악형을 못 이겨서 없는 소리를 자백하였으나 나중에 후회하여 긍허라고 호를 지어서 평생에 자책하였다. 그때의 형편으로 보면 내 혀끝이 한 번 움직이는 데 몇 사람의 생명이 달렸으므로 나는 단단히 결심을 하였다.
하루는 또 불려 나가서 내 평생의 지기가 누구냐 하기로 나는 서슴지 않고,"오인형이 내 평생의 지기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종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는 일이 없던 내 입에서 평생의 지기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극히 반가워하는 낯빛으로 그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천연하게, "오인형은 장연에 살더니 연전에 죽었다." 하였더니 그놈들이 대로하여 또 내가 정신을 잃도록 악형을 하였다.
한 번은 학생 중에는 누가 가장 너를 사모하더냐 하는 질문에 나는 창졸간에 내 집에 와서 공부하고 있던 최중호의 이름을 말하고서는 나는 내 혀를 물어 끊고 싶었다. 젊은 것이 또 잡혀와서 경을 치겠다고 아픈 가슴으로 창 밖을 바라보니 언제 잡혀왔는지 반쯤 죽은 최중호가 왜놈에게 끌려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진고개 끝 남산 기슭에 있는 소위 경무총감부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도수장에서 소나 돼지를 때려 잡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었다. 이것은 우리 애국자들이 왜놈에게 악형을 당하는 소리였다.
하루는 한필호 의사가 심문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겨우 머리를 들어 밥구멍으로 나를 들여다보면서, "모두 부인했더니 지독한 악형을 받아서 나는 죽습니다." 하고 작별하는 모양을 보이기로, 나는 "그렇게 낙심 말고 물이나 좀 자시오."하고 위로하였더니, 한 의사는, "인제는 물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는 다시 소식을 몰랐는데 공판 때에야 비로소 한필호 선생이 순국한 것과 신석충 진사가 사리원으로 끌려오는 도중에 재령강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을 알았다.
하루는 나는 최고심문실이라는 데로 끌려갔다. 뉘라서 뜻하였으랴, 17년 전 내가 인천 경무청에서 심문을 당할 때에 방청석에 앉았다가 내가 호령하는 바람에 '칙쇼 칙쇼'하고 뒷방으로 피신하던 도변 순사놈이 나를 심문하려고 앉았을 줄이야. 그놈은 전과같이 검은 수염을 길러 늘이고 낯바닥에는 약간 노쇠한 빛이 보였으나 이제는 경무총감부의 기밀과장으로 경시의 제복을 입고 위의가 엄숙하였다.
도변이 놈은 나를 보고 첫말이, 제 가슴에는 엑스광선이 있어서 내 평생의 역사와 가슴 속에 품은 비밀은 소상히 다 알고 있으니 일호도 숨김이 없이 다 자백을 하면 괜찮거니와 만일에 은휘하는 곳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나를 때려 죽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변이 놈의 엑스광선은 내가 17년 전 인천 감옥의 김창수인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연전 해주 검사국에서 검사가 보고 있던 '김구'라는 책에도 내가 치하포에서 토전양량을 죽인 것이나 인천 감옥에서 사형정지를 받고 탈옥 도주한 것은 적혀 있지 아니하였던 것과 같이 이번 사건에 내게 관한 기록에도 그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내 일을 일러바치는 한인 형사와 정탐들도 그 일만은 빼고 내 보고를 하는 모양이니 그들이 비록 왜의 수족이 되어서 창귀 노릇을 한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의 한구석에는 한인 혼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도변이 놈이 나의 경력을 묻는데 대하여서 나는 어려서는 농사를 하다가 근년에 종교와 교육사업을 하고 있거니와 모든 일을 내놓고 하고 숨어서 하는 것이 없으며, 현재에는 안악 양산학교의 교장으로 있노라고 대답하였더니 도변은 와락 성을 내며, 내가 종교와 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은 껍데기요, 속으로는 여러 가지 큰 음모를 하고 있는 것을 제가 소상히 다 알고 있노라 하면서, 내가 안명근과 공모하여 총독을 암살할 음모를 하고,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려고 부자의 돈을 강탈한 사실을 은휘한들 되겠느냐고 나를 엄포하였다. 이에 대하여 나는 안명근과는 전연 관계가 없고 서간도에 이민이란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빈한한 농민에게 생활의 근거를 주자는 것뿐이라고 답변한 뒤에, 나는 화두를 돌려서 지방 경찰의 도량이 좁고 의심만 많아서 걸핏하면 배일로 사람을 보니 이러고는 백성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모든 사업에 방해가 많으나 이후로는 지방의 경찰에 주의하여 우리 같은 사람들이 교육이나 잘 하고 있도록 하여 달라, 학교 개학기도 벌써 넘었으니 속히 가서 학교일을 보게 하여 달라 하였다. 도변이 놈은 악형은 아니하고 나를 유치장으로 돌려보냈다.
이제 보니 도변이 놈은 내가 김창수인 것을 전연 모른 것이 확실하고 그렇다 하면 내 과거를 소상히 잘 아는 형사들이 그 말을 아니 한 것도 분명하였다. 나는 기뻤다.
나라는 망하였으나 민족은 망하지 아니하였다. 왜 경찰에 형사질을 하는 한인의 마음에도 애국심은 남아 있으니 우리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아니하리라고 믿고 기뻐하는 동시에 형사들까지도 내게 이러한 동정을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후의 일각까지 동지를 위하여 싸우고 원수의 요구에 응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김홍량은 나보다 활동할 능력도 많고 인물의 품격도 높으니 나를 희생하여서라도 그를 살리리라 하고 심문시에도 내게 불리하면서도 그에게 유리하게 답변하였고, 또 "(구몰니중홍비해외) 거북은 진흙 속에 있으며 기러기는 바다 위를 나른다."라고 중얼거렸다.
전후 일곱 번 심문 중에 도변의 것을 제하고 여섯 번은 번번이 악형을 당하여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악형을 받고 유치장으로 끌려 돌아올 때마다 나는, "나의 목숨은 너희가 빼앗아도 나의 정신은 너희가 빼앗지 못하리라." 하고 소리를 높여 외쳐서 동지들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내가 그렇게 떠들면 왜놈들은, "나쁜 말이 해소도 다다꾸." 하고 위협하였으나 동지들의 마음은 내 말에 격려되었으리라고 믿는다.
내게 대한 제 8회 심문은 과장과 각 주임경시 7, 8명 열석 하에 열렸다. 이놈들이 나를 향하여 하는 말이, "네 동류가 크게 자백을 하였는데 네놈 한 놈이 자백을 아니하니 참 어리석고 완고한 놈이다. 네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아니하기로서니 다른 놈들의 실토에서 나온 네놈의 죄가 숨겨지겠느냐. 너, 생각해 보아라, 새로 토지를 매수한 지주가 밭에 거치장거리는 돌멩이를 추려 내지 아니하고 그냥 둘 것이냐. 그러니 똑바로 말을 하면 괜찮거니와 한결가티 고집하면 이 자리에서 네놈을 때려 죽일 터이니 그리 알아라." 한다. 이 말에 나는, "오냐, 이제 잘 알았다. 내가 너희가 새로 산 밭에 돌이라면 그것을 맞았다. 너희가 나를 돌로 알고 파내려는 수고보다 패어내우는 내 고통이 더 심하니, 그렇다면 너희들의 손을 빌 것이 없이 내 스스로 내 목숨을 끊어 버릴 터이니 보아라." 하고 머리로 옆에 있는 기둥을 받고 정신을 잃고 엎어졌다.
여러 놈들이 인공 호흡을 한다, 냉수를 면상에 뿜는다 하여 내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에 여러 놈 중에서 한 놈이 능청스럽게, "김구는 조선인 중에 존경을 받는 인물이니 이같이 대우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본직에게 맡기시기를 바라오." 하고 청을 하니 여러 놈들이 즉시 승낙한다.
승낙을 받은 그놈이 나를 제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담배도 주고 말도 좋은 말을 쓰고 대우가 융숭하다. 그놈의 말이 자기는 황해도에 출장하여 내게 관한 조사를 하여 가지고 왔는데 그 결과로 보면 나는 교육에 열심하여 월급을 받거나 못 받거나 한결같이 교무에 열심하고 일반 인민의 여론을 듣더라도 나는 정직한 사람인데 경무총감부에서도 내 신분을 잘 모르고 악형을 많이 한 모양이니 대단히 유감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심문하는 데는 이렇게 할 사람과 저렇게 할 사람이 따로 있는데 나 같은 인물에 대하여서 그렇게 한 것은 크게 실례라고 아주 뻔뻔스럽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한다.
왜놈들이 우리 애국자들의 자백을 짜내기 위하여 하는 수단은 대개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으니 첫째는 악형이요, 둘째는 배고프게 하는 것이요, 그리고 세째는 우대하는 것이다. 악형에는 회초리와 막대기로 전신을 두들긴 뒤에 다 죽게 된 사람을 등상 위에 올려 세우고 붉은 오라줄로 뒷짐결박을 지워서 천정에 있는 쇠갈고리에 달아 올리고는 발등상을 빼어버리면 사람이 대룽대룽 공중에 달리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얼마 동안을 지나면 사람은 고통을 못 이기어 정신을 잃어버린다. 그런 뒤에 사람을 끌러 내려놓고 얼굴과 몸에 냉수를 끼얹으면 다시 소생하여 정신이 든다. 나는 난장을 맞을 때에 내복 위로 맞으니 덜 아프다 하고 내복을 벗어 버리고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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